Mission Field

선교 현장

영적 현장, 절망과 싸우다

작성자
WEC
작성일
2017-06-05 11:51
조회
1721
신앙의 불이 살아나다
이곳의 절반 이상은 사막과 광야가 차지하고 있는 척박한 땅이다. 마치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자라고, 열매를 맺기가 힘든 척박한 곳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아주 오래전, 5세기부터 시작한 네스토리안 기독교의 선교가 투르크계 민족에게도 미쳤다. 그리고 8세기까지 이어지면서 교구가 세워질 정도로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했다. 하지만 13-14세기 이후로 기독교는 이슬람을 지지하는 중앙아시아의 정복자 티무르의 제국으로 인해 점차 세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2년 스웨덴 선교회를 통해서 카쉬카르 선교가 시작되었다. 비록 20년 동안 별다른 성장은 없었지만, 500여 명의 위구르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열매를 맺었다. 하지만 1933년 동투르키스탄(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많은 남자 그리스도인들은 매질과 고문을 당하고 참수되었다. 여자 그리스도인들은 무슬림과 강제 결혼을 해야만 했다. 이때의 고난 속에서 100여 명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하였다.
신장에서의 기독교 신앙의 역사는 그 불이 꺼지고 다시 살아났다 또 꺼지기를 반복해 왔다. 1980년 중반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으로 닫혔던 문이 외국 사람들에게 열리기 시작하였고, 새롭게 선교의 불이 살아났다. 서양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을 시작으로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곳에서 사역자들이 들어오고 있다. 하지만 많은 꿈을 가지고 이곳에 온 사역자들은 역사 속에서 깊게 자리 잡은 이슬람과 대륙의 단단한 경계 가운데, 여전히 닫힌 사람들의 마음 문을 직면하고 있다.

절망이 오다
“선생님, 조금만 있어 봐요. 다 똑같아져요.” 사역지에 처음 왔을 때, 이곳에서 오래 사역을 했던 사역자에게서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그는 현지어와 공용어를 모두 잘 하는 명문대 출신의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역자들에게서 존경도 받고 있었다. 그의 말은 ‘노력해 봤자 조금 있으면 지치고, 결국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는 의미였던 것 같다. 그것은 나에게 절망스러운 권면이었다. ‘절망’은 이곳에 사는 사역자들에게 가장 큰 영적 싸움의 요소이다. 이곳의 민족들 깊은 곳에 절망이 흐르고 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절망은 사역자들에게도 쉽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정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무슬림들, 소수민족의 언어와 공용어를 모두 공부해야 하는 어려움 등등 좌절할 이유가 우리에게 많이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교회개척이 어렵다’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나의 생각 속에 자리를 잡는다. 내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패배주의에 빠져드는 것이다. 나는 무슬림들을 위해 사역을 하던 중에 이런 패배감과 씨름을 했다. 그때에 동료 사역자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영적 씨름에서 승리했던 경험이 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살렸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적 승리를 위한 열쇠이다.

말씀으로 서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사도행전 18장 9, 10절) 하나님께서 주신 이 땅을 향한 약속의 말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천년 전부터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셨다. 믿음의 불이 꺼질 때는 다시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셔서 불을 붙여주셨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보내셔서 당신의 불을 이곳의 사람들 속에 지피고 계신다. 지금, 이곳 전체 인구의 0.001%도 안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불을 이 땅에 던지고 있다. 그리고 그 불이 언제쯤 번지게 될지도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신장을 넘어서 중앙아시아까지 그 복음의 불을 던지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 무리한 일인가?
글 A

RUN지 78호(2016년 가을)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