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본부장 칼럼

Column of last direc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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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교회, 따뜻한 사람 (1월정기기도회)

작성자
WEC
작성일
2011-11-24 23:38
조회
4907
- 최철희 -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약1:27)


사람들에게 교회, 지금 현재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이 교회의 세속화를 지적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리스도인들까지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경제력 앞에 무력해지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은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라고 말들을 합니다. 경제력이 강한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고, 경제력이 강한 대기업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며 개인의 생활권 안에도 깊숙이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물질문화, 물량주의에 깊이 물들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최고가 되는 것, 크게 되는 것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 세상적인 사고방식에 나도 모르게 젖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교회도 어느덧 성장중심의 덫에 빠져있고, 교인은 숫자가 교회의 우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고 있는 건 아닌가? 마치 대기업이나 대형마트와 같은 힘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염려가 됩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참모습 그리스도인의 참모습, 더 나아가 선교사의 참모습이 어떤 것인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 WEC 실천원리 중에 <거룩>이라는 두 번째 기둥이 있습니다. 이 거룩을 우리는 Practical Holiness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외형적이거나 정지된 의미의 거룩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과 삶에서 실천되는 내면적이면서도 동적인 거룩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굉장히 실제적이며 실천적인 의미의 거룩이지요.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1960년대까지도 남부는 북부에 비해 흑인 차별이 퍽 심했습니다. 북부에 살던 한 흑인 크리스천이 있었는데, 어느 날 남부를 방문하게 됩니다. 주일이 되어 한 교회를 찾아갔는데, 교회 입구에서 그는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 교회는 흑인이 들어올 수 없는 백인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이 흑인 그리스도인은 발걸음을 돌이키면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주님, 남부에는 아직 저 같은 흑인이 들어가서 예배드릴 교회를 찾기 어렵군요.” 그 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얘야, 나도 그 교회는 못 들어가는데 네가 어떻게 들어가겠냐?”오래 전 이야기 입니다만, 제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강남에 있는 어떤 꽤 큰 규모의 교회를 잠시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시간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신 분이었기 때문에 교회는 예배 중심의 교회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분위기는 매우 엄숙했고, 소리를 내는 것도 아주 조심스러웠습니다.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있었기 때문에 발자국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예배가 시작되면 목사님과 예배위원들이 핸드벨 연주에 맞추어 등단을 했고, 성가대의 연주도 수준급이었습니다. 한 번은 저의 먼 이모뻘 되는 분이 서울에 오셨기 때문에 함께 그 교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모는 식당으로 돌아다니면서 막일을 하는 분이었고 교회에 나간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같이 교회당에 막 들어서려고 하는데, 이모님이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멈칫 발걸음을 멈추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데 들어가도 괜찮나?” 이모는 너무나 깨끗하게 정돈된 분위기에 눌린 것입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자기처럼 냄새 나는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괜찮다고 하며 억지로 잡아 끌어 우리 곁에서 예배를 드리게 했지만 이모님은 예배 시간 내내 불편함을 참아야 했습니다. 그 이후 우리는 교회를 옮겼습니다. 우리 이모님 같은 분이 쉽게 자리하고 앉을 만한 그런 교회로 말입니다.


요즘에는 시간이 좀 있어서 집에서 TV 보는 시간이 많이 늘었습니다. 또 양재동에서 철수한 기념으로 커다란 디지털 TV도 하나 샀습니다. 아침 시간에 예전에 이미 방영한 적이 있는 <허준>이란 드라마가 재방송이 되더라고요. 이런 장면이 있어요. 허준이가 가난해서 의원에도 가지 못하는 병자들을 고쳐준 일로 유의태 의원 사람들에게 호되게 당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유의태는 허준을 불러서 묻습니다. “병부일지를 적었느냐? 그걸 내보이라”고 했습니다. 허준이가 병부일지를 꼼꼼이 적어놓은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유의태는 내심 놀라고 기특한 눈빛으로 이것 저것 묻는데, 소갈병 환자에게 처방한 것을 보고 묻습니다. “소갈병에는 여러 가지 약재가 많은데 왜 하필 <오미자>를 처방했느냐고요. 허준의 대답은 병자가 가난하여 약을 구할 수 없어 보여서 가장 구하기 쉽고 싼 <오미자>를 처방했노라고 했습니다. 유의태는 허준의 의술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긍휼이 여길 줄 아는 심성을 칭찬해 주면서 자신의 약재창고지기를 맡깁니다.


연속극 속에서도 가끔은 이렇게 진리를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의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의술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이라는 것, 어쩌면 우리 선교사들에게도 적용되고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 아닌가 여겨졌습니다. 우리가 사역을 위해 부름을 받았지만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의 심성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일은 좀 못해도 주위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할 줄 아는 사람, 하나님께서는 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헤아리면서 좀 더 너그럽게 담을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뭐니뭐니해도 머니가 제일이라고 합니다. 최고가 되는 것, 크게 되는 것을 성공이라고 하며 교회도 자꾸만 세상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이러한 위기감 속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다시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한 마디로 순수성입니다. 약한 자,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 서로서로에게 대한 따뜻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세상적인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생각과 말과 삶을 살아드리는 것, 새해에는 우리 마음을 더욱 세속으로부터 지켜 하나님 앞에서 더러움이 없는 경건에 이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