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Field

선교 현장

영적 돌파를 갈망하며

작성자
WEC
작성일
2018-08-23 11:37
조회
1248

이른 아침부터 따가운 햇살이 창문 넘어 방 온도를 높이기 시작하는 늦은 여름 월요일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일주일 중 월요일은 제일 싫어하는 날, 금요일은 제일 좋아하는 날이 되었다. 대부분의 월요일이 그랬듯이 그날의 출근길도 가볍지는 않았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사무실 문을 힘차게 열며 “좋은 아침”이라고 모두에게 인사하고, 직원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하며 안부를 물었다. 이곳 문화에서 남자들의 인사 방식은 악수이다. 좀 더 친밀하다면 악수와 함께 허그(hug)를 한다. 친구와 인사할 때 친구 옆에 있는 처음 보는 사람과도 악수로 인사하지 않으면 무례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거의 월요일마다 지각하는 직원은 오늘도 변함없이 출근 전이었다. 주말부부인 것을 고려하여 연장근무로 대신하기로 했지만 그날따라 회의 때까지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아 마음이 언짢았다. 자리에 앉아 잠시 하루를 주님께 의탁하는 기도로 일과를 시작했다.

아침 회의 후 B가 상기된 얼굴로 잠시 면담을 요청했다. B는 사내에서 비교적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가진 직원이었다. 주일 모임 중 갑자기 집안에 사람들이 들이닥쳐 스마트폰을 비롯한 모든 개인 소지품을 모두 압수하고 그곳에 있던 이들의 이름을 적고 경찰의 연락을 기다리라는 통보를 남겼다고 했다. 그들에게 어렵고 힘든 시간이 또 시작된 것이다. 가능한 개인 소유물들을 처분해야 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압수된 개인 물품들은 돌려받지 못했고, 지불해야 할 부당한 벌금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수도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무슬림 성향이 강한 지방에 사는 신자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핍박을 견디다 못해 수도로 올라와 있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B는 이런 이유로 고향에서 올라온 이들을 도울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거주등록법과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I의 어머니는 복음을 들은 후 믿음이 자라 교회에서 전도자로 봉사했었다. 마치 바울의 영적 아들 디모데와 같이 I에게도 어머니의 믿음이 있었다. 일자리가 부족한 이곳에서 신자들이 고정적으로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직장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 낮과 밤으로 최선을 다해 일하면서 자신을 개발하고 있었다. 그는 말씀에 대한 열정으로 특별한 경로를 통해 성경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으며 자신을 양육해 주길 바라며 찾아왔다. 그에게는 우즈베크 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향한 특별한 마음이 있었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우즈베크 신자들과 무슬림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어 내게도 좋은 시간이었다. 외부에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그가 스스로 자립하고 또 자립하는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도전하고 있다.

C시에 사는 A는 한 선교사의 기도로 난치의 병을 가지고 태어난 그의 갓난 아이가 치료되는 기적을 체험한 후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의 집에는 값이 나갈 만한 물건들은 거의 없었고, 수입도 일정하지 않았지만, 그는 수입이 생기는 족족 남을 돕는 일과 전도하는 일에 사용했다. A를 만나면 한 시간 이상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나의 얘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열정적이다. 대부분 우즈베크 청년 신자들은 결혼 적령기가 되면 신앙의 도전이 찾아 온다. 믿음을 가진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어느덧 성인이 된 A의 자녀 N도 이 나라 문화에서는 아주 늦은 나이이지만 아직 배우자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 국적에 상관없이 믿는 사람이라면 된다는 이들의 믿음의 기도가 속히 응답되길 바란다.

J 지역은 가장 우즈베크적이고 무슬림 성향이 강한 지역으로 그 지역을 여행할 때는 항상 약간의 긴장감을 갖게 한다. 신실한 무슬림인 M의 집에 초청받아 J 지역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M은 시장, 공원, 사원 등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고, 자신의 사업장도 보여주며 그의 비즈니스 포부를 말해 주었다. 날이 저물어 함께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는 중 갑자기 M이 꾸란과 하디스를 보여주며 전도하기 시작했다. 전에도 같은 일을 가끔 경험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적극적인 무슬림은 처음이었다. 잘 되었다 싶어 나도 예수님의 비유들을 이야기를 들려주듯 말해 주었지만 그는 귀담아듣지 않을 뿐 아니라 깊은 탄식도 내뱉었다. 한 시간이 넘는 토론으로 테이블 위에는 이슬람 경건 서적까지 펼쳐졌다. 토론은 논쟁으로 넘어갔고, 서로는 격앙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쯤 해서 끝내는 것이 좋겠다 생각이 들었다. M이 준비해 놓은 잠자리에 누웠을 때 알지 못할 두려움이 찾아왔다. M이 기분이 상해서 나중에 후환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시편 말씀을 읽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자 평안이 찾아왔다. 기도한 대로 다음날 아침에는 따뜻한 환송을 받으며 헤어질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J 지역과 M의 가정에 대한 특별한 마음이 자리 잡게 됨을 느꼈다. J 지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석양으로 물든 지평선 옆으로 확 트인 도로를 막힘없이 달리는 택시에서 영적 돌파를 더욱 갈망했다.

수도권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장기적인 사역이 어려운 현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이 땅에 교회들이 제한을 뛰어넘어 확 트인 믿음의 도로를 달릴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글 서로 사랑

RUN지 85호(2018년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