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길, 적은 무리”

은 사람이 주께 돌아오는 것은 기쁜 일이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고대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다양한 방법과 부드러운 말로 사람들을 제자의 길로 초청한다. 그리고 이는 흔히 사역의 열매를 많은 숫자로 간주하는 경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 같다. ‘과연 그런가?’ 예수님이 제자의 길에 대해서는 무엇이라 고 말씀하셨는지 되짚어보자.

예수님은 제자의 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 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5~27)’

사역 현장에서 수량화 할 수 있는 사역이나 눈에 보이는 결과로 우리 헌신의 정도나 제자도의 척도로 삼을 때가 종종 있어서 양적 성장에 몰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만약 손쉽게 많은 사람이 가고 있다면 반문해 보라고 하시는 것 같다. ‘과연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고 있는가?’ 지혜가 부족해서 초래되는 고난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 가치를 부여잡고 나아가기 때문에 경험하는 고난이 있는지 순간순간 질문을 던지고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지난 2~3년간 선교 동원이 줄고 있다는 반갑잖은 소식이 줄을 이었다. 최근 한국선교연구원이 발표한 ‘실질적인 선교사 파송이 감소했다’는 분석도 눈에 띈다. 젊은 층의 반응도 예전과 같지 않고, 전적인 헌신을 주저하는 청년, 대학생들의 모습을 안쓰러워하는 학생단체 사역자들이나 청년 사역 담당 목회자들의 우려도 많이 들린다.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말씀과 훈련 프로그램이 보급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성도 수가 줄어든 것에서 이유를 찾기도 하고, 최근 인구에 회자되었던 불미스러웠던 일들 때문이라고도 하며, 물질주의에 빠진 세대의 영향력이라고도 한다. 물론 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예수님 당시에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많은 무리가 따랐지만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가치를 이해하고 따랐던 무리는 적은 몇 사람에 불과했었기 때문에 제자의 숫자는 의외로 적었다. 심지어 주님은 주님을 따르던 이들을 향해 종종 반문하셨다. ‘정말 십자가를 질 수 있는가? 나의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는가?’ 망대를 지을 때 비용을 모두 계산하고 완공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처럼, 전쟁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지 따져 본 후 싸울 것인가 화친을 할 것인가를 정해야 하는 것처럼 제자의 길도 마찬가지라며 ‘자기 자신’을 버리고 따르라고 하셨다. 바로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좁은 길’이요 ‘맛을 내는 소금’이었다.

숫자를 중요시하거나 성공한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교회가 조직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이전과 이후의 성도들의 신앙 양태가 매우 달랐다는 사실이다. 순교를 각오하고, 땅끝으로 가라는 명령을 인생의 최우선으로 받아들이면서 예수의 재림을 꿈꾸던 사람들의 ‘좁은 길의 영성, 아래로부터의 영성’이 ‘성공 신화, 상향의 영성’에 묻혀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복음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땅끝의 증인으로 서는 지름길은 매일의 삶에서 자기를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는 결단의 연속이다. 물론 이것이 독단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진리에 부합하는 삶,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덧입고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득 차는 삶이 되는 것, 바로 우리가 걸어야 하는 선교의 길이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제자도의 시작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 공동체는 어디에 있는가?선교 공동체로서 세상을 향해 어떤 메시지를 던져야 할 것인가?’ 길을 멈추고 질문할 때다.

글 박경남, 조경아 한국WEC본부장

* 위 글은 RUN지 68호(2014년 봄호) 권두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