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라 오려거든”

교지의 타문화에서 선교사로서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적응력이 나 영성, 영육간의 강건함, 문화에 대한 이해, 진취적인 마음, 확고한 부르심 등 많은 것들을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대부분은 굳이 타문화에 가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 서 이 사회 속에서 온전한 제자로서 살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놓쳐서는 안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끊임 없는 자기부인’ 일 것이다.

왜냐하면 고국을 떠나 선교지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익숙한 환경을 포기하겠다는 행동이고,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여러 가지 신분과 사회적 기득권을 포기하고 현지인들의 문화와 삶 속으로 들어가겠노라고 결단하는 ‘자기부인’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닌 것 같다.

선교지에서 갓 언어를 마친 선교사 초년병 때의 일이다. 우리 부부는 언어 훈련을 마 치고 선교지의 정부 병원에서 자문 의사로 일하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현지 의료인을 가르치는 일이 주어졌고 비록 언어는 많이 부족했지만 ‘새로운 의학 지식을 배워 보라’며 현지 의사들을 가르치려고 최선을 다해 일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동료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한국과 이곳은 다르다’는 이야기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우리가 병원에 가서 하 는 일이라고는 동료들과 몇 잔의 차를 마시며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오는 게 전부였다.

하루는 너무나 답답한 마음에 이런 기도를 했다. ‘주님 저희가 여기 차를 마시러 온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들을 가르치고 깨우치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왜 저희를 부르셨습니까?’ 한참을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셨다. ‘나는 네가 선생이 되라고 부른 것이 아니다. 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겠니?’ 바로 그 때 문득 깨닫게 된 것은 동료들을 가르칠 대상으로 여겼지 진정한 친구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선교지 사람들을 섬기러 왔다고 했었지만 섬기기 보다 가르치려는 자세를 갖고 있음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셨다.

우리 부부는 태도를 돌이키기로 회개하고 그 다음날 가서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곳 상황과 질병을 잘 모릅니다. 말도 짧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 이후에 우리가 혹시 도울 것이 있다면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말을 들은 동료들은 박장대소를 하고는 ‘그래 두 사람이 배워야 해. 진작 그렇게 했어야지.’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동료들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신이 나서 우리 손을 잡고 환자들의 상황을 설명해 주거나 격의 없이 우리들을 대하기 시작했다. 외국인이라는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후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역사하시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를 내려 놓고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우리 선교회에 속한 모든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열대 풍토병의 위험, 테러의 가능성, 부적당한 교육 제도로 인한 자녀 교육의 어려움, 넉넉하지 않은 후원, 부적절한 의료, 오랜 수고에도 냉담한 선교지 사람들, 비자 거절이나 현지 정부로부터의 추방 등 비록 그 종류는 다르지만 매일의 삶 속에서 일일이 다 표현하기 어려운 자기부인의 길을 걷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런 외부적인 요인을 넘어서 ‘사역을 통한 자아 성취’ 같은 자기 중심적 동기와 씨름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다. 결코 쉽지 않지만 지난 100년 동안 수많은 선교사들은 하나님의 이 부르심에 응답했고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하고 걸어 왔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신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날마다 나 자신이 추구하고 싶은 삶의 모습이나 욕심, 이 세 대가 말하는 가치나 삶의 표준을 따르지 않고(롬12:2) 자기를 십자가에 두고 기꺼이 주님을 따르는 삶, 필요하다면 어떤 대가라도 지불하며 주님과의 동행을 택하는 길이 우리가 선택한 선교의 길이다.

글 박경남, 조경아 한국WEC본부장

* 위 글은 RUN지 66호(2013년 가을호) 권두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