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선교적 존재로 살아가기
2. 국제미아
우리 가족이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외국인으로 4년 반 쯤 살아보니 내 나라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현지인들의 사소한 배려와 작은 섬김에도 고마울 때가 많이 있었다.
한 번은 호주에 간지 얼마 안되었을 때였는데, 어떤 호주 친구가 자기 농장에서 Bonfire (농장에 한 해 동안 쌓아 놓은 쓸모 없는 나무 토막등을 태우곤 한다. 호주판 쥐불놀이인가? 아무튼 내가 다녔던 학교 농장에서도 매년 Bonfire를 했는데 불은 집 채 만큼 컸다.)를 한다고 놀러 오라는 초대를 했다.
몇몇 주위분들이 같이 간다고 해서 호주 문화 체험도 할 겸 우리 가족도 가고 싶었으나 우리는 아직 차가 없었다. 그러던 중 우리 가족에게 마침 한 선교사님이 자기 차를 빌려 주테니 다녀오라고 해서 잘 됐다 싶었다. 그런데 차를 빌려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 차에 문제가 좀 있어서 시속 80 km 이상은 속도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선교사들 생활이 뭐 그리 넉넉하겠나. 고장이 있으면 그런대로 스스로 고쳐보다가, 큰 돈든다 싶으면 그냥 적응하고 사는거지 뭐.) 뭐 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행선지도 모르고 앞 차만 따라 나섰던 것은 잘못이었다.
앞 차는 고속도로로 향했고, 시속 100 km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녁이었고, 최대 속도 80 km밖에 낼 수 없는 나는 앞 차를 놓쳤다. 나는 그곳이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핸드폰도 없었다. 그리고 심지어 지갑도 안가지고 왔다! 낯선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나는 이 일로 마치 국제 미아가 된 듯 했다. 특별히 영어가 서툴렀던 그 당시 나로서는 더욱 그랬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밤, 일행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이미 물 건너 간것 같고, 다시 집으로 돌아 오려고 고속도로에서 한 동네로 빠져 나왔는데, 이런! 길을 잘 못 들었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더 미궁속으로 빠져만 갔다.
어딘지도 모르는 작은 동네 길가에 우리만 덩그라니 놓여져 있었다. 호주는 (특히 타즈마니아의 한적한 시골 마을은) 저녁 6시가 되면 동네 슈퍼가 문을 닫고, 7시가 넘으면 길거리에 차도 잘 다니지 않는다. 겨우 지나 가는 차를 세우고 길을 물어 보았지만 호주에 간지 이제 겨우 몇 주 밖에 되지않은 나는 영어도 잘 못하는데다, 생소한 타즈마니아 엑센트를 잘 알아들을리 만무했다. 고개만 갸우뚱 거리다가 그 사람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저 멀리 경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Help! Help me!”
다급한 소리를 경찰이 들었는지 차를 돌려 우리 쪽으로 왔다. 우리는 지금 길을 잃었고 집을 찾아 가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주소를 묻길래
“41 Station.” 이라고 했다. (실은 41 Station Road) 경찰이 다시 물었다.
“Which station was it?”
나는 제차 “41 STATION.” 이라고 또박또박 대답 했다. 길 이름이 ‘스테이션 로드’ 였는데 자꾸 ‘스테이션’이라고 하니까 경찰은 무슨 역이름인가 하고 한참을 헷갈려 했다. 그러고는 우리가 잔뜩 긴장을 하고 있으니까,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한국에서 온 우리는 학생이고, 영어로 선교훈련을 받으러 여기에 왔다고 했다. 그러자 결국은 우리가 선교사 훈련 대학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우리를 학교까지 에스코트 해 주었다. 물론 요청한 대로 시속 60 km로 천천히 말이다. 그리고 그 경찰은 나더러 “너 선교사 되려면 영어 공부 무척 열심히 해야 되겠다.” 는 농담도 잊지 않았다. (진담이었나?!) 아무튼 그 경찰의 친절한 태도와 페트롤카의 인도를 받았던 것은 잊지 못할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사소한 배려와 작은 섬김의 예치고는 꽤 특별한 기억을 꺼내 들었나? 뭐, 길 잃어버린 것은 내게 일상적인 일이니까……)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