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동 여섯식구 이야기 (14. 뭐니뭐니해도 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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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뭐니뭐니해도 머니?

우리 부부는 여러 선교 단체 중에 WEC이라는 국제 선교단체에 마음이 끌렸다. WEC은 캠브리지의 7인 이었던 C. T. Studd가 설립한 선교회로 100년이 넘은 초 교파 국제 선교단체이며, 믿음 선교 (Faith Mission) 와 팀 사역을 통해 전방개척 (Reaching Unreached) 과 교회개척 (Planting Churches) 그리고 선교를 위한 동원 (Mobilization) 을 하는 선교회였다. 특별히 WEC이 추구하는 ‘믿음선교’는 우리가 추구하던 선교사의 삶의 방식과 가장 맞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부르심을 확인하는 시간들이 있었고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WEC으로 부르신 것과 선교사 훈련 대학으로 보내실 것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받았다. 이 단체의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선교사 훈련 대학을 가야 했다. 모든 선교 후보생들이 다 이 선교사 훈련 대학을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같이 신학도 하지 않았고, 타문화 경험도 그저 단기선교여행 몇 번 다녀온 게 전부이고, 영어는 늘 자신감이 없는 후보생들은 꼭 받아야 할 훈련이었다. 그 곳에서 WEC 선교 후보생들은 영어, 신학, 타문화 훈련을 비롯하여 공동체 생활을 통한 영성 훈련과 사역의 경험들을 쌓게 된다. 우리 부부는 호주에 있는 선교사 훈련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한국에서 IELTS 점수를 받았다. 그리고 3년 동안 선교 훈련을 받을 것을 권유 받아 그에 맞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었다. 선교사 훈련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일 년치 학비를 미리 송금해야 했다. 그래야 입학허가서가 나오고, 그 입학허가서를 가져야만 호주 학생 비자를 신청할 수 있었다.

우리 부부 두 사람이 모두 선교 후보생이었으므로 1년치 학비 곱하기 2에다가, 8개월 난 아이가 있었으므로 Childcare Centre 비용이 필요했다. 그 외에도 호주까지 날아갈 비행기 표와 학비 이외에 들어갈 생활비도 필요했다. 한 번도 그렇게 큰 돈은 손에 쥐어본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하나님께서 그 동안 가르쳐 주시고 말씀을 통해 받은 약속보다도 ‘선교훈련을 받으러 해외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하는 현실에 뿌리박은 돈 걱정이 앞섰다. 일단 손에 쥘 수 있었던 현찰은 몇 십만 원에 불과했으니 학비는 고사하고 비행기 표 구할 돈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 돈 걱정이 앞서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우리 눈 앞에 보이는 1년치 학비는 비록 백두산 같이 높아 보이긴 해도 어떻게든 우리의 힘과 지혜와 노력으로 만들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뒤에 곧 만나게 될 히말라야 산맥은 어떻게 넘을 것인가? 나머지 2년 동안의 어마어마한 훈련비와 3년치 생활비 그리고 선교사 훈련 대학을 마치고 난 이 후에 또 다른 나라에서 받아야 하는 3개월 간의 후보자 오리엔테이션까지 생각하니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모 교회는 우리가 목사안수를 받지 않은 평신도이기 때문에 정식 선교사로 협력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담임목사님께서는 우리 부부를 자식처럼 아껴주시며 진심으로 걱정해 주시고 조언해 주셨다. 그때마다 우리의 계획들과 믿음선교에 대한 신념을 소상히 말씀 드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현실을 고려하라는 말씀과 교단 신학교를 가라는 조언 이었다. 그 후에 몇 분의 장로님들을 만나고 선교부장님을 만나보았으나, 어쨌든 모 교회는 평신도 선교사에게까지 투자할 만한 재정적 여력도, 선교 정책도 없었다. 모 교회를 통해 재정적으로 후원 받지 못하는 것은 크게 마음이 어렵지 않았지만, 우리를 위해 마음을 다해 기도해 주시던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과 멀어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이제 우리가 교회를 떠나고 나면 공식적으로 교회와 연결된 것이 없으므로 교회 내에 우리를 위한 기도모임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고,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분들과의 교류도 약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꾸준히 우리를 기억하시고 기도해 주시는 분들이 있었다.)

이렇게 앞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우리도 약간의 믿는 구석(?)이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아내 명의로 된 작은 빌라였는데, 그걸 처분하면 1년치 학비와 비행기 값이 어떻게든 나오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희소식이 들려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는 평택미군기지 바로 옆인데, 용산에 있는 미군기지가 다 평택으로 이전해 내려와서 미군기지 확장을 계획 중이었다. 정부의 미군기지 확장 계획안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자 자연히 땅값이 올랐고, 우리가 사는 빌라 가격도 함께 올랐다. 아내가 이 빌라를 살 때 보다 무려 5배까지 가격이 오를 거라는 소문이 동네에 파다했다. 이것만 처분하면 3년치 학비와 생활비가 깨끗하게 해결 될 것만 같았다. ‘그래, 이 집만 팔리면, 그래서 우리의 계획대로만 되면 우리는 선교 훈련 나갈 수 있다.’ 허나 공인중개사에 집을 내 놓으러 갔을 때 황당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정부에서 미군기지 근처의 땅을 투기지역으로 묶어서 앞으로 3년간 부동산 거래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3년간이나! 3년이면 우리가 선교 훈련 다 마치게 될 무렵인데…… 그때까지 우리에게 유일한 돈줄인 이 집을 팔지 못하게 된다니! 제발 잘못된 정보이기를 바라며 다른 공인중개사를 찾아갔다. 역시 마찬가지 말을 듣고 왔다. 학비를 송금해야 하는 날이 몇 달 안 남은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선교를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 까지도 치열한 마음의 전쟁을 치러가며 겨우 마음 먹었는데, 이제 막 나가기도 전에 이런 일을 당하니 마음이 녹아질 만도 했다. 그냥 예전처럼 돈 벌면서 규모 있는 생활을 한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될 텐데, 굳이 이렇게 준비도 안된 사람이 선교하겠다고 나서서 화를 자초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을 크게 갖기로 했다.. 상황을 보니 이건 나갈 수 있는 때가 전혀 아니었다. 속으로 실망하지 않기 위해 여러 장치를 두기도 했다. 우선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선교에 대한 마음을 품게 하신 것도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긴 가는데 올해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올해 저를 선교사 훈련 대학에 못 보내시더라도 저는 실망하지 않겠습니다. 혹시 제가 실망할까 봐 너무 염려하지 마옵소서. 저는 괜찮습니다.’ 하고 하나님을 안심시키기에 이르렀다. 앞으로도 나가지 못하고 그렇다고 뒤돌아 갈 수도 없는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다음에 계속……)